[초동여담]'박통'과 'DJ'라는 벽에 갇힌 사람들
[초동여담]'박통'과 'DJ'라는 벽에 갇힌 사람들
  • 전필수
  • 승인 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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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DJ'를 빨갱이로 아셨다. TV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빨갱이 짓을 한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당신보다 세 살 연하인 '박통'은 우리 국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영웅이었다. 그가 비명에 가지만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좀 더 빨리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으셨다. 할아버지와 나의 고향은 경북 상주, '박통'이 태어난 구미와 붙어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년 만에 장가를 든 곳은 광주와 인접한 전남 담양이다. 처가에서 5ㆍ18 국립묘지까지는 차로 불과 10여분 거리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처가 쪽 식구들은 선거 때면 언제나 기호 2번이 우선이다. 특히 DJ는 여느 정치인과는 격이 다른 어른이다.
 
대구시장 후보로 나선 야권의 김부겸 후보가 '박정희 컨벤션센터' 건립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서울 생활-지금은 경기도민이니 정확히는 수도권 생활- 30년째다 보니 대구시장 후보가 누구인지 최근에야 알았다.) 김 후보의 공약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오죽하면 저런 공약을 내놨을까'였다.
 
야당 후보가 영남에서, 여당 후보가 호남에서 당선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만큼 힘들다. 영남은 전ㆍ현직 대통령 부녀의 위세가 굳건하고, 호남은 여전히 '죽은 DJ'를 뛰어넘을 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김 후보가 내세운 명분은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다. 식상해보이는 이 명분에 얼마나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명분이 이슈가 될 만큼 여전히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내 고향 친구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상당수가 1번을, 처의 고향 친구들은 같은 식으로 2번을 찍을 것이다.
 
모든 갈등이 봉합돼야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지역 간 정치색이 다른 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인정과 예의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생각은 아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두 생각이 그냥 다를 수도 있다.
 
평생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셨던 할아버지는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들을 기회조차 제대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른 견해에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게 아닐까.



전필수 팍스TV차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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