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선 칼럼] 이재용 사면,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어경선 칼럼] 이재용 사면,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 어경선 논설위원
  • 승인 2021.0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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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취임 4주년 특별연설과 기자회견을 통해 마지막 임기 1년을 앞둔 각오와 구상을 밝혔다.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성찰과 반성은 없고 ‘내 갈 길’만 고집했다. 지난 4년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으로 경제를 포함해 기존 정책의 근간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내심 ‘4·7 재보선’에서 드러난 ‘달라져야 한다’는 민심을 헤아려 국정 기조를 전환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국민의 마음은 되레 더 무거워졌다. 

국민 원성이 워낙 커서인지,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숙였다. “재보선에서 죽비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심판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코로나19로 경제는 멍이 들고, 일자리는 줄어들고, 양극화는 심화하는데도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거나 “경제를 가장 빠르게 회복시키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일관했다. 통합이 아닌 분열의 정치, ‘내로남불’에 무너진 공정과 정의, 평등에 대해서도 말이 없었다. 

답답한 중에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과 관련한 언급이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비켜가면서도 “충분히 국민의 많은 의견을 들어 판단하겠다”고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것과 조금은 다른 기류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서도 “사법 정의와 공감대 등을 생각하며 판단하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완강한 반대에서 한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반도체 경쟁력을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 사면은) 형평성, 과거 선례, 국민 공감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원칙론을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고 우리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더욱 높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사이에서 총수 부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 회장 사면론이 나온 배경이 무언가. 문 대통령이 언급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삼성을 이끌어갈 선장인 이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룹 총수가 수감생활로 인해 경영의 손발이 묶여있어서는 미·중 간 패권 다툼의 틈새에서 우리의 반도체 주도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논리다. 코로나 백신 확보에 이 부회장이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경제계를 중심으로 종교계, 시민단체 등에서 국익을 위해 이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현재 20여건이 넘는 이 부회장 사면 청원 글이 올라와 있다. 동의자가 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민 여론도 그리 나쁘지 않다. 여론조사업체 데이터리서치가 지난달 26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2%가 사면에 찬성했다. 몇몇 여론조사의 추이를 보면 대체로 10명 가운데 7명가량이 사면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 내에서도 사면 얘기가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최근 “코로나19 상황에서 경제가 매우 불안하고 반도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필요성을 국민도 요구하고 있다”며 “정부가 좀 적극적인 고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도 지난 6일 인사청문회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무언가 배려조치가 있어야 되지 않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 알고 있다”며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물론 ‘사회 정의와 법치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문재인 정부 지지층의 반발도 적지 않다. 당연히 재벌 총수라고 해서 엄정한 법 집행에 예외일 수는 없다. 형평성 논란도 있다. 여론조사의 찬반 숫자만으로 사면이 이뤄져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경제가 처한 상황은 매우 절박하다. 이 부회장이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실보다는 득이 더 클 것이라는 경제 논리는 설득력이 있다.

사면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고도의 통치행위다. 두 전직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사면은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국민 통합이라는 총합적 차원에서, 국익우선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어제 회견에서 “올해 우리 경제가 4%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정부 역량을 총동원하고 민간의 활력을 높이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우리 경제의 중요한 버팀목인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게 둬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부회장 사면, 문 대통령의 전향적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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