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선 칼럼] 문재인 대통령과 ‘레임덕’의 덫
[어경선 칼럼] 문재인 대통령과 ‘레임덕’의 덫
  • 어경선 논설위원
  • 승인 2020.0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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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도 피해가지 못하는 ‘덫’이 하나 있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권력 누수 현상, 이른 바 ‘레임덕(Lame Duck)’이다. 지난 1988년 이후 역대 대통령 누구도 레임덕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책이 꼬이고 인사 실패가 불거지고 민심이 등을 돌리면서 국정 장악력이 급속하게 떨어지곤 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레임덕은 대통령을 뒤를 쫓아다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4년차인 1991년 서울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비리가 터진 뒤 힘을 잃기 시작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4년차에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삐끗하더니 이듬해 불거진 차남 현철 씨가 연루된 한보비리 사건으로 권력 기반이 허물어져 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임기 4년째인 2001년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게이트가 잇따라 터지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차남 홍업씨와 삼남 홍걸씨의 금품수수 비리는 결정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른 3년차인 2005년 러시아유전 개발 및 행담도 게이트와 이듬해 ‘5.31 지방선거’ 패배에 부동산 가격 폭등이 겹치면서 국정 동력이 흔들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집권 후반기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 ‘만사형통(萬事兄通)’ 논란, 세종시 수정안 국회 부결 등으로 레임덕에 시달려야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2016년 12월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로 임기 4년도 못 채우고 일순에 무너졌다.

그렇다면, 지난 5월 임기 3년을 지나 후반기에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은 어떨까. 여권은 ‘레임덕’ 우려에 선을 그었다. ‘4·15 총선’ 압승에 40~50%대의 높은 지지율에서 보듯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민주당 설훈 최고위원은 “당내에 레임덕 우려에 대한 기류는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김영배 의원도 “레임덕은 청와대의 정치적 주도권이 상실된 것을 의미하는데 현재 당·정·청 관계로 볼 때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다”라고 자신했다.

과연 그럴까.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오’다.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등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정책의 부작용으로 민심이반이 깊어지면서 역대 정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만만치 않다. 특히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이상 기류로 이미 레임덕의 덫에 걸린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23번째 부동산 대책에 여당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레임덕의 징후라는 것이다.

‘다주택 논란’의 당사자 중 한 명인 김조원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부적절한 행동도 입길에 오르고 있다. 김 전 수석은 사의를 표한 7일 청와대를 떠나 10일 문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 불참했고 후임 수석 발표 브리핑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노영민 비서실장과의 갈등에 따른 불만 때문이라는 얘기가 도는데, 이유야 어찌됐든 3일 간의 업무 공백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항명을 넘어 레임덕의 전조”라는 야권의 지적이 괜스러운 게 아니다.

‘4·15 총선’ 직후 70%에 육박하던 문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 40%대로 추락하고 부정 평가는 50%를 넘어섰다. 이전 대통령들이 후반기 10~20%대에 허덕이던 데 비하면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심상치 않다. 단단한 지지층이던 여성과 20·40대, 진보층, 호남의 이반 정도가 심각하다. 급기야 정당 지지도에서도 민주당이 통합당에게 뒤처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론이 차갑게 식고 있다는 조짐이다. 예삿일이 아니다.

조국, 윤미향, 오거돈, 박원순 사태 등을 보며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한 민심이 총선 이후 176석 거대 여당의 막무가내 독주와 부동산 실정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분석이다. 문 대통령이 강조해 온 ‘평등과 공정, 정의’는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23차례나 쏟아낸 대책에도 지난 3년간 서울 아파트 중위값은 52% 뛰고 전셋값도 56주 연속 상승하는 등 부동산 정책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민심이 떠나는 건 당연하지 싶다.

이쯤 되면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민심을 다독이는 게 정상일 터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부동산 대책 효과 나타나고 있어 주택 시장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되레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부었다. 가격이 폭등해 집을 사지도 못하고, 전세와 월세까지 오르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노영민 실장을 유임시킨 청와대 인적 교체도 쇄신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여권 내에서조차 ‘대통령이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다.

정권의 힘은 민심에서 나온다. 거듭된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무능, 내 갈 길만 가겠다는 오만, 그리고 남 탓만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야당과의 협치를 외면하고, 국민 인식과 동떨어진 독단적 정책을 밀어붙이고, 내 사람만 돌려쓰는 외눈박이 인사는 ‘레임덕’을 앞당길 뿐이다.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진정으로 ‘평등과 공정, 정의’의 시대를 열어가겠다면 “나만 옳다”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바보의 벽’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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