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와 함께 '남한산성'의 역사를 거닐다
김훈 작가와 함께 '남한산성'의 역사를 거닐다
  • 박준범 기자
  • 승인 2017.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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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우리의 '아픈 역사'

 

남한산성 남문. 사진=박준범 기자
웅장함이 느껴지는 남한산성 남문. 사진=박준범 기자

[팍스경제TV 박준범 기자] 400여 년 전 백성들의 울음과 조선의 굴욕을 삼켜낸 남한산성. 그 웅장함과 위엄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애가 느껴졌다. 그렇게 남한산성은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아름다움'이 혼재했다.

7년 전 출판된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하면서 당시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15일 오전 기준, 350만 명 관객을 돌파했다. 청명한 가을하늘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14일, 김훈 작가와 남한산성을 거닐었다.

연주봉옹성 근처에서 설명 중인 김훈 작가.
연주봉옹성 근처에서 설명 중인 김훈 작가. 사진=박준범 기자

영화 개봉의 여파인지 주말 이른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남한산성을 찾았다. 집결지인 남한산성 남문에 들어서자 굳건히 서 있는 성벽과 성벽을 감싸고 있는 웅장한 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가파른 산세, 웅장하고 탄탄했던 산성. 서울의 전경이 모두 보일 정도로 높은 지대. 인조가 남한산성에 입성할 때 이 웅장한 남문을 통과했는데 이때만해도 인조는 47일 동안 갇혀있을 지 예상을 했을까.

1636년(인조14년) 12월 14일(음력)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조정.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적의 공격을 피하기에 남한산성은 그야말로 최적의 공간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조정이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을 택한 이유는 충분해보였다.

남문을 시작으로 숭열전-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문-행궁으로 이어지는 이날의 산행. 햇빛이 내리쬐었지만 가을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 때문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가을 초입의 바람이 이렇게 차가운데 그때 당시 병사들의 손과 발이 얼 정도로 살을 에는 추위는 어땠을지 상상조차하기 싫었다.

당시 총사령부였던 수어장대. 사진=박준범 기자
당시 총사령부였던 수어장대. 1층이 낮게 지어진 이유는 적의 포탄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진=박준범 기자

그렇게 1시간 가량 걷자 당시 군을 총괄하던 수어장대에 다다랐다. 김훈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서 제일 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수어장대의 1층은 천정이 낮은데 이는 적의 포탄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5개 군을 총괄하던 수어사의 지휘·통솔이 이뤄졌던 수어장대. 적의 동태를 알리는 각종 문서와 장군들과 병사들이 수없이 오갔을 이곳은 현재는 인증샷을 찍기 위해 들르는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해발 500m를 넘나드는 지형, 그리고 8km가 넘는 성벽. 적들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웠을 이곳. 하지만 그것이 또 조선을 스스로 고립케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오직 말로 싸웠다”는 김훈 작가의 말처럼 그들 스스로 만든 ‘관념’과 ‘정통성’이라는 장벽이 적에 의해서가 아닌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진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랬던 조선이 단 한 번의 전투를 일으킨 곳이 바로 북문이다. 고립돼 있던 47일 동안 유일하게 성문을 나가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 당시 병사 대부분이 손과 발이 얼어 무기를 질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 영의정 김류는 500명을 선발해 성문을 열고 나선다. 하지만 500명은 매복한 청의 부대에 전멸했고, 사기가 급격히 저하된 조선은 투항에 이른다. 결국 북문의 전투는 투항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조선조정이 청 군대에게 향할 때 이용한 남한산성 서문. 사진=박준범 기자
조선조정이 청 군대에게 향할 때 이용한 남한산성 서문. 사진=박준범 기자

 

p 122. 김상헌 “봄이 오지 않겠느냐. 봄은 저절로 온다”

북문전투에서 전패한 조선은 고립된 지 47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청에 투항한다. 김상헌이 말한 '봄' 기운이 느껴질 때쯤이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기 시작하고, 봄 기운이 산성에도 퍼질 무렵. 조선은 삼전도 앞 들판에서 왕이 청의 군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인조가 청의 군대를 맞으러 나가던 곳, 남한산성 서문. 서문의 통로는 사람 2명이 가까스로 지나갈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다. 인조가 나갈 때 뒤따르던 백성들의 통곡과 절규가 좁은 공간의 서문을 가득 채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행궁에서 이뤄진 김훈 작가와의 대화 시간. 사진=박준범 기자
행궁에서 이뤄진 김훈 작가와의 대화. 사진=박준범 기자

북문을 지나 조선의 왕이 머문 '행궁'에서 김훈 작가와의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김훈은 인조의 투항에 대해 “조선의 왕은 백성의 아버지” 라며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고 백성의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삶의 길은 따로 있는 것이다. 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삶의 길이다”고 강조했다. 인조의 선택이 가장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없지만 "살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어 보였다. 

p 271. 최명길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 이옵니다”

영화 <남한산성>중 서날쇠(고수 역)는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배 안곪는 것이 저희 같은 백성들의 바람입니다”라고 김상헌(김윤석 역)에게 고한다. 김훈 작가의 말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살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어보였다. 

남한산성을 거닐며 굴욕이 상징이자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남한산성이 후대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는 아이러니함에 대해 생각했다.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을 만큼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았다. 남한산성을 거니는 외국인들도 꽤나 많았다. 분명한 건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명명될 만큼 남한산성에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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